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랑스 공산당 (문단 편집) === 2차 세계대전~과도내각 시대 === 1939년 [[스탈린]]과 [[히틀러]]가 [[독소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자 공산당은 크렘린의 장녀[* 프랑스는 '가톨릭의 장녀'로도 통한 바 있다. 이래저래 맏딸 이미지.]라는 멸칭에 걸맞게 이를 열렬히 지지하며 독일과 우호관계를 유지할 것을 주장했고 정부의 국방예산 증액에 반대했다. 심지어는 방위산업체 내부의 공산당원 노동자들이 고의로 무기를 고장내고, 파업을 시전하는 등 [[나치군]]의 [[파리(프랑스)|파리]] 함락 및 [[비시 프랑스]] 정부 수립에 혁혁한 공을 세운다. 프랑스는 독소불가침 조약을 사실상 독일이 배후의 소련의 위협을 없애고 노골적으로 프랑스와 한판 뜨겠다는 신호로 받아들였다.[* 영국과 프랑스가 히틀러의 침략정책과 도발을 감내했던 것은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그중 가장 중요한 것중 하나가 바로 독일이 소련에 대항한 방파제 역할을 할 것이라는 기대였다. 히틀러가 소련과 제휴하면서 빅 엿을 먹여버리자 영국과 프랑스도 독일과의 전쟁이 불가피함을 인정하고 전쟁을 준비했다. ]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 공산당은 소련 및 독일 편을 들었고 프랑스 정계에서 좌우 할 것 없이 공공의 적으로 찍혀버렸다. 프랑스 공산당은 [[사회당(프랑스)|사회당]]의 반파쇼 인민전선에 적극 협력하고 있었는데 하루아침에 이를 뒤집어버리면서[* 물론 소련과 제3인터내셔널을 추종하면서 기존 당내노선을 내던질 판이되자 당연히 당론은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당내 주류에 동조하지 않는 일부 인사들은 사태를 관망하거나 탈당하여 활동을 중단해버렸다.] 우파 뿐 아니라 사회당을 완전히 적으로 돌려버렸다. 독소 불가침 조약이 체결된지 얼마지나지 않아 독일과 소련은 사이좋게 폴란드를 갈라먹고 영국과 프랑스가 나치독일에 선전포고하면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가짜전쟁]] 기간의 8개월간 [[에두아르 달라디에|달라디에]] 정권은 공산당에 해산 명령을 내렸고 공산당 의원들은 당적을 포기하든지 체포돼서 군사재판에 서는 것 중 양자택일을 해야했다. 우파 뿐 아니라 사회당에서도 공산당 의원의 불체포 특권 박탈에 동의했고, 생디칼리즘 단체인 노동총연맹(CGT)에서도 공산당 출신들이 배제해버렸다. 정당 뿐 아니라 관련된 기관지나 공산당 출신의 지자체장들까지 줄줄이 박살났고 국민 여론까지 최악으로 돌아서면서 프랑스 공산당은 재기불능의 상태에 빠진것으로 보였다. 비시프랑스의 페탱 치하에서도 공산당에 대한 탄압은 계속되어 공산당은 지하조직으로 연명해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공산당은 크렘린의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회당계, 드골계 [[레지스탕스]]와의 공동투쟁을 거부했다. 심지어는 독일 점령당국에 협조하여 어떻게든 [[똥꼬쇼|환심을 사려고 애쓰는 등]] 모호한 입장을 유지했다. 이 같은 태도는 비시 정권이 성립된 1940년 7월부터 [[독소전]]이 발발하는 1941년 6월 무렵까지 거의 1년 가까이 이어졌다. 1941년 [[독소전쟁|히틀러가 스탈린의 뒤통수를 치자]] 프랑스 공산당은 기존의 대독협력 노선에서 전면투쟁으로의 전환을 선언하고 뒤늦게 레지스탕스 운동에 합류한다. 하지만 레지스탕스때 규모있게 참여해서 활약한 덕택에[* 당시 전체 레지스탕스 조직 가운데서 절반 가량이 공산당 계열이라는 분석이 나올정도다.] 프랑스 대중들로부터 종소, 극좌 정당이라는 음침한 이미지를 누그러뜨리는데 성공했다. 연합군의 파리 함락 이 후 결성된 과도내각에서 [[모리스 토레즈]] [[서기장]]이 [[부총리]]로 입각하고, [[프랑스 제4공화국|제4공화국]] 출범 이후 치러진 [[1946년 프랑스 국민의회|국민의회 선거]]에서 182석을 획득하며 '''원내 1당'''에 올라서는 등 전성기를 맞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